Info./Pastor's Column

정해 놓은 한계점을 넘어보는 연습

YKCC 2023. 8. 24. 13:06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나의 한계와 선을 넘어보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기준과 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를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또 교회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또 교회에서도 우리는 늘 나와는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반드시 불편함과 갈등이 발생을 합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간에도 그렇습니다. 회사 동료들 사이에도 그렇고, 학교 친구, 그리고 교회에서 만난 성도들끼리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사이에서 벌어진 불편함과 갈등을 이겨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도망치거나 여기까지라고 결정하고 관계를 끝내버립니다. 사실은 자기의 의지로 끝내기 보다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계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모든 것이 내 중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내가 공부하고 쌓아온 지식들, 내가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받으면서 생겨난 나만의 기준들, 그리고 외부로부터 유입되거나 학습되어진 잘못된 세계관과 가치관 등이 가장 옳고 진리에 가깝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경험해온 하나님, 혹은 자신이 배워온 신앙적인 경험과 체험, 그리고 그 기준들이 그 무엇보다 옳다고 여깁니다. 

 

누가복음에 15장에 등장하는 두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중에 첫째 아들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성실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했고, 맡겨주신 일을 충성되게 감당해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자신의 한계점을 넘어서는 결정을 아버지가 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는 혼내거나 쫓아내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를 안아주고 입 맞추며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열기까지 합니다. 첫째 아들은 자신이 정해놓은 한계점을 무너뜨린 아버지에게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열어둔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첫째 아들은 자신의 한계점을 건들인 하나님을 무시 해버립니다. 

요나서의 이야기도 동일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요나에게 한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니느웨(앗수르의 수도)로 가서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명령을 요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앗수르는 다른 여러나라들을 침략하고 괴롭혔던 이방 나라였고, 언제든지 북이스라엘을 공격 해올 수 있는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요나는 그들을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결국 회개를 한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끝까지 니느웨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분노하며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니느웨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는 자신의 한계점을 건들인 대상이 하나님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중심적인 종교생활에 물들어 버린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동안의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이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나를 위한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배와 신앙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며, 안타깝게도 예배를 드리면 드릴 수록 더욱 깊은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할 때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건 너무한거 아니야?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자나?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등의 말들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이런 말들과 생각들을 품으며 살아갑니다. 왜 이런 말들이 나오며 우리는 분노하는 것일까요? 나의 한계점을 누군가가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지 못하고 저런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관계를 정리하거나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사람을 품어줄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지와 노력으로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에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나와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원수를 실제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자신을 때리고 욕하고 침뱉으며 조롱했던 원수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만이 다른 누군가를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이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경험되어져야만 나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다른 이들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쉽게 착각을 합니다. 내가 온전하게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자기와 잘 맞는 사람과 어울리거나 나에게 잘해주고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과 잘 지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에 문제가 없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런 착각을 완벽하게 부셔뜨리는 계기들을 우리는 결국에는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상치 못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과 불편함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신앙이 예수님의 십작의 사랑을 온전하게 경험했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한계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직면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나만의 생각대로 이건 너무하다고 여기며 도망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푹 빠져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경험되어야만 합니다.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분께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하셨다는 놀라운 사랑에 감사와 기쁨이 매일매일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시도록, 그분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도록 날마다 우리의 본능과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우리의 한계점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내가 그어놓은 그 선과 한계점 아래에서 이리저리 인간적으로 계산하고 나름의 전략을 짜면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을 흉내내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캐나다에 온지 이제 7년차가 되었습니다. 오자마자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여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코로나 시기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안정적인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늘 고통과 고난과 기대하지 않았던 문제로 씨름해야만 했습니다. 홀로 외로이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과 분노를 삼키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버텨왔던 시간들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비신자 한 사람이 우리 교회를 찾아와 내가 믿고 내가 아는 예수님을 믿게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다른 한계점을 넘어서기 위해서 오늘도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한계점을 넘어선 뒤에 경험하게 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은혜와 일하심을 기대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교회로 불러주신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성품을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가 우리의 삶에 녹아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되면 우리가 극복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나의 삶을 양육하고 이끌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